"아편굴 투성이에 쥐가 득실거리고, 치외법권이죠.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말그대로 홍콩의 신시티(Sin city)예요"

-영화 <아비정전>을 구룡성에서 촬영한 배우 양조위












▲ 구룡성채의 단면도







구룡성채는 원래 청나라의 요새였습니다. 

아편전쟁으로 홍콩섬이 영국의 식민지로 영구할양되자 청은 영국이 북진하여 구룡반도까지 점령하고

중국 본토를 노리지 않을까 걱정하여 구룡성채를 영국을 감시하는 기지로 썼습니다. 

그러나 애로호사건(2차 아편전쟁)후 북경조약에서 청은 구룡반도까지 영국에 영구할양하였고,

구룡성채는 자연히 영국령 홍콩의 영역에 들어왔습니다.









물론 청은 성채만은 내줄 수 없다며 비지로 만들었고 청의 군인들과 행정관들이 주둔하였습니다. 

세금도 북경으로 계속 내고요. 그러나 영국군은 성채를 공격해 청군을 쫓아 버렸고,

이후 이 성채는 영국과 중국 둘 다 관리하지 않아 버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성채는 신해혁명으로 청이 멸망하자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2차대전 때 일본군은 영국이 수병 몇만명만으로 방어하던 홍콩을 손쉽게 점령했고

(당시 영국은 중국을 우습게 보고 홍콩과 광동 국경선에 거의 전력을 배치하지 않았습니다) 

성채의 성벽은 카이탁공항 확장공사를 위해 헐렸습니다. 성벽이 헐리자

중국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대거 성채로 모이기 시작했고, 성채는 순식간에 슬럼화되었습니다.

일본군이 쫓겨간 뒤에는 국공내전이 이어져 광동성에서 많은 피난민이 홍콩으로 몰려왔고 이들은 구룡성채에 정착했습니다. 

성채는 전에 언급했던 것 처럼 중국영토였기 때문에 홍콩의 공권력의 손이 닿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비지"인 셈인데 문제는 3不觀이라 하여 영국,중국,홍콩 식민정부 셋 다 손을 떼어버린 곳이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무정부 상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어이는 수배범 등의 부류들이 성채에 들어왔습니다. 

결국 이곳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집단은 삼합회가 됩니다. 

그야말로 삼합회의 말이 법이었던 것입니다. 삼합회는 1974년까지 구룡성채를 지배하다가

홍콩경찰이 대테러부대 등을 동원한 대규모 검거작전을 전개해 쫓겨났습니다.










무서운 삼합회가 쫓겨난 후, 성채는 무질서한 팽창을 겪게 됩니다. 

땅은 한정되어 있고 중국에서 넘어온 밀입국자의 수는 늘고..

밀입국자들은 홍콩내에 합법적인 연고가 없었으므로 성채에 살게 되었고 

이런 사람들이 늘자 성채가 기형적으로 성장해 골목은 마구 꼬이고

낮에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전등을 켜고 건물의 층수는 14층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이 이상은 근처에 자리잡은 카이탁 공항의 영향으로, 더 이상 층수를 올리는게 불가능)

한마디로 고층슬럼이 형성된 것입니다. 보통 슬럼가는 낮은 건물이나 판자집으로 대표되지만 

구룡성채는 정치적 특수성과 최악의 머리수 때문에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고층슬럼가가 된 것입니다. 

성채의 외관은 흉물스러운 낡은 아파트 (거의 버려진듯한 집들) 의 집합체이며 햇빛은 한가운데 쪽에서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건물 옥상으로까지 쓰레기가 널려있고 복도에는 살찐 쥐들과 바퀴벌레가 득실거리는 더러운 환경이었습니다. 

1인당 평균 1.1평을 점유하는 극악의 구조였기 때문에 화장실과 세면장은 공동 (문과 칸막이가 없는 중국식화장실)이었습니다. 

제일 심각한 건 햇빛도 들지 않는 어둠의 세계였기 때문에 범죄율이 높았다는 것입니다. 

홍콩인들은 더럽고 위험한 곳이라며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오래된 중국의 거리로서 관광객을 모으기도 했고 맥당웅의 <성항기병> 등 영화촬영지로도 쓰였습니다.

구룡성채의 이런 음란하고 퇴폐적인 이미지는 일본의 아니메,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사이버펑크 소설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깁슨의 뉴로맨서에서도 

이와같은 홍콩의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성채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만큼 홍콩에선 금지된 온갖 어둠의 요소들이 판을 쳤습니다. 

성매매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건 물론, 홍콩에서 금지된 개고기를 파는 식당이 즐비했으며 마약소굴도 여러 곳 있었고 

야매 치과의사의 진료도 성행하는 등 "수상한 영업"의 본거지였습니다. 특히 야매 치과의사들의 비위생적 무면허 진료는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도 구룡성채도 결국은 사람사는 동네였습니다. 그 험한 동네에서도 아이들은 옥상에서 천진난만하게 놀았습니다. 

성채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던 학교도 있었고, 연장자를 위한 양로원도 있었으며 이발소도 있었고

국수, 만두, 죽을 파는 식당도 있어서 성채 주민들이 이 곳에서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심지어 성채 내 비밀공장들 중에는 시내에 내다 팔 에그타르트나 딤섬, 장난감을 만드는 공장도 많았습니다 (물론 위생상태는 그나마 제일 괜찮았던 곳들이었습니다)        













마약소굴, 매음굴, 야매의사가 몰려있는 "악의 소굴"이었지만 그 속에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삶은 힘겨웠겠지요. 

"홍콩드림"을 꿈꾸고 못사는 중국을 탈출해 홍콩에 어렵게 건너갔지만 

이들의 현실은 쓰레기 더미에 묻혀 사는 불법체류자에 불과했으니까요. 

성채 주민 중에는 심지어 성채 밖으로 한번도 나가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1986년 더 이상 방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홍콩 식민정부는 경찰 파견 등 구룡성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시작합니다. 

경찰이 들어오고 범죄자들이 모두 잡혀가자 치안은 급속도로 안정되었고 ,

불량한 위생상태도 위생서의 단속으로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2년 홍콩정부는 이 성채를 철거해 공원으로 재개발하게 됩니다.

 이 때 성채 주민들과 토지보상 문제로 마찰이 빚어졌으나, 

너무 슬럼화된 곳이라 사실상 부동산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여 미미한 보상이 주어졌습니다.        

 

 

 출처 : http://www.overdose.co.kr/ 글쓴이 : ㅁㅁ님



http://df3714.tistory.com/




  1. SAUN 2018.04.24 22:34 신고

    예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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