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는 길게는 기원전 6000년대부터 시작되어온 유서 깊은 역사를 가졌다.


그 민족은 아직 세상에 산만큼 거대한 괴수가 있던 시절, 그 괴수보다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냈고, 

세상 어디에도 인간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그들의 생활 하나는 인류의 시초가 되었고, 그들이 움직인 돌 하나는 인류의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집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문화도, 그 민족도. 


신 그 자체인 파라오의 혈통에 전해져 내려오던 바다리-badari-혈통, 고대의 수많은 침략자들을 물리쳐내고, 

이길 수 없었던 지배자들조차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신의 혈통, 최초의 인간들은 분명 끝임없이 번성해야 할 운명을 가졌다. 

그리고 번성해왔다. 아마도 아무르-빈 알 수가가 코란을 들고 시리아 사막을 건넌 650년의 그 때까지는.


이 글은 그 고대 이집트를 단절시킨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최초의 헬레니즘 왕조(기원전400년) 이후로 마지막 동로마의 총독이 지배하던 시기(기원후 600년)까지의 약 1000년간,

이집트의 지역적 수도는 알렉산드리아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로,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설된 이후로 언제나 지중해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대도시였으며, 학문과 상업의 총본산이었다. 


하지만 이슬람 지배자들은 바다에 익숙치 않았고, 바다에 익숙한 이집트인들에게 우위를 빼앗기는 것이 두려워 

수도를 내륙의 멤피스와 카이로 등으로 옮기고 인구를 분산시켰다. 

아테네, 시라쿠사, 로도스, 카르타고, 로마, 콘스탄티노플 등의 대도시들이 걸었던 것과 같은 마지막이라는 운명이, 알렉산드리아에게도 온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알렉산드리아보다 작은 항구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북서 지중해를 장악했던 이집트의 해상무역도 그렇게 끝이 났다. 




무역과 농업, 이집트를 지탱하던 두 가지 기둥 중 하나는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다른 하나도 당연히 끝날 수 밖에 없었다.





싹을 움틔우는 축복받은 나일의 범람이지만, 

동시에 뿌린 씨를 쓸어가고, 저장해둔 곡식을 썩혀버리는 저주받은 나일의 홍수이기도 하다. 

이러한 나일이 언제나 이집트의 젖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집트로부터 시작되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를 거치며 더욱 발전된 정교한 계측법과 농업기술 덕분이었다. 

수학이 발달한 이집트인들과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로마인들은 나일을 다룰 줄 알았다. 하지만 아랍인들은 그럴 줄을 몰랐다. 


초기의 이슬람인들, 즉 우마미야와 압바스 왕조(600-960)는 이집트인들에게 그들의 땅을 경작하도록 했다.

하지만 파티마와 아이유브 왕조(960-1250)를 거치며 이집트의 이슬람세력은 고착화되었고, 경직화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인 농부들은 땅을 빼앗기고 노예가 되었고, 기독교인 관료들은 손발을 잘리고 투옥되었다. 


그 결과는  960년, 1000년, 1200년의 대기근으로 이어진다.




"더 이상 기근이 호전될 기미가 없자, 농부들은 도시로 몰려갔습니다. 

도시민들은 농부들이 자신들의 식량을 훔쳐갈까봐 두려워합니다. 

조그만 범죄라도 저지른 사람은 공개적으로 화형됩니다. 약간의 조미료가 가미된 채로요.



 가난한 자들은 목화, 시체, 나무, 그리고 동물의 대변을 먹으면서 죽어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전에 벌써, 그들은 그들의 자식들을 팔았습니다. 


 군중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구워 바구니에 담은 부모를 성나서 끌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굶주린 눈빛으로, 공개적으로 화형시켰습니다.


 굶주려 죽은 뒤에 먹히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화형당해 죽은 뒤에 먹히는 것도 상당한 행운입니다. 

죄수는 타 죽기 전에 끌어내려지고, 사람들은 반쯤 익어 비명지르는 죄수의 살을 잘라냅니다. 

 

 이제는 가난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부유한 사람들도 사람을 먹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부위가 어디가 나은가에 대해 토론을 나누고, 아주 자랑스러워 합니다. 

저는 한 남자가, 부잣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울부짖는 것을 보았습니다.


 식료품점에서는 소금과 향신료로 간을 한 인육을 팔고 있습니다.


 멤피스에서 온 친구는 상인입니다. 

그는 오늘 어린아이의 고기로 그의 물품을 물물거래하려는 시도를 다섯 번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에 익숙해졌습니다. 한낮의 길거리에서 여자가 장정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정들은 여자가 어린아이를 납치해 먹었다고 비난했습니다. 아무도 그 말에, 장면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장정들은 여자를 식료품점으로 끌고갔습니다."


 -압드 알-라티프, 11세기 이집트의 의사-


 


굶주린 자들 - 이집트 벽화



"카이로에는 기괴한 물건이 있다. 

이는 창처럼 긴 장대 끝에 굵은 밧줄이 묶여있고, 끝에는 휘어진 칼날 같은 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마치 낚싯대 같지만 말라붙은 나일에서 고기를 잡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 낚싯대를 든 사람은 대로변 건물의 지붕에 올라가 납작 엎드린다. 

그리고 황폐한 대로에 사람이 지나가면, 낚싯줄을 던져 칼날로 살을 꿰어 당기는 것이다. 

굶주림에 말라 비틀어진 희생자는 쉽게 낚여 올려져, 지붕 위에서 분리된다. 


 이 낚싯대는 사람을 사냥하기보다, 사냥한 사람을 거리의 부랑자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스탠리 란네-파울, 17세기 영국의 역사가, 전기작가- 




 범람으로 인한 피해가 계속되자 이슬람 위정자들은 둑을 쌓아 치수를 하려 했다. 

그리고 이는 나일강의 범람을 막는 동시에 가뭄 또한 불러일으킨다. 


 엉망이 된 농업기반에 의해 흉년이 계속된다. 얼마 안 되는 곡식은 아랍 지배자들이 있는 도시로 가고, 

노예 상태로 농장에서 일하던 이집트인들은 굶어죽는다. 농업 인구가 굶어 죽으면서 농업 생산량은 더 떨어진다.


 농업 생산량이 떨어지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농민들은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든다. 

하지만 이 시기 이집트의 대도시들은 단지 아랍인 위정자들의 행정기능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 외에 노동력을 요구하는 산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농업이 망했으면 무역을 통해서 식량을 들여오면 되지만, 상업은 이슬람교도들이 멸망시켜버렸다. 

비단 항구도시를 몰락시켜버린 것 뿐만이 아니라, 이슬람교도들은 성전이라는 명목하에 지중해에 해적들을 풀어놓았고, 

지리적으로 이슬람교도 해적과 기독교도 기사단 사이에 낀 이집트의 무역업은 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알리 없는 농민들은 일단 도시로 꾸역꾸역 몰려들고 본다. 

그 결과 안 그래도 부족했던 식량은 더 고갈된다.


 

 Human stew

 

 "인육을 먹자!"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1000년, 1200년의 기근은 페스트와 겹쳤다. 

굶어죽은 시체, 진흙탕이 된 나일강, 사라진 위생관념과 인육 섭취로 인한 수직감염 등이 대재양을 일으킨 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대재앙의 결과 이집트의 아랍 왕조는 결단난다. 그리고 이들보다 더한 미친놈들이 이집트에 온다. 


 




맘루크는 투르크계 분파로, 원래는 투르크족이 아랍인들에게 판 전투노예들이었다. 

말, 활, 창, 검, 채찍, 그물, 방패의 일곱가지 장비를 전부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노예만이 맘루크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이 맘루크들이 반란을 일으켜 아랍 왕조를 전복시키고 맘루크 왕조를 세운다.


태생이 노예였고 전사였던 맘루크들은 실로 막장 of 막장의 통치를 보여준다.


단적으로, 맘루크 군주들은 자금이 필요하면 길가는 아무나 납치해서 노예로 팔았다. 

몽골이 남기고 간 흑사병이 나라를 휩쓰는데 자기들끼리 싸운다. 10년만에 왕이 다섯 번이 갈아치워진 적도 있다.


그리고 맘루크 군주들은 내키는 대로 고대 이집트의 문화유산을 훼손했다. 

스핑크스의 코가 잘린 것도 이때고, 친선이라는 명분으로 오벨리스크들을 뽑아다가 각국에 선물한다. 

미라는 연료로 취급했고, 무덤은 도굴한다. 

영국인 교수가 술탄에게 찾아가 이 미친 문화 훼손을 중지하라고 항의까지 할 정도였다. 


사실 맘루크들이 이집트 문화유산을 아끼지 않은 것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고대 이집트와 전혀 연관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집트가 오스만과 영국에 차례로 복속되자 입장이 바뀐다.


맘루크들은 국민들에게 애국심과 저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고대 이집트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언급하고, 

이집트인들은 과거 위대했던것과 같이 지금도 위대할 자격이 있다고 열변한다. 

그런 그들의 연설은 이집트인들의 마음에 고취감을 불러일으켜, 1900년대, 드디어 이집트는 독립한다. 


그러나 그 안에 정작 고대 이집트인의 후손, 미라로 남겨진 고대 이집트인들이 고귀하게 여겼던 바다리-badari-혈통은 단 한 명도 없었다. 20세기에 벌여진 유전자 연구가 이를 증명한다. 


인류가 시작될 대 부터 존재해왔고, 위대한 3제국(페르시아, 알렉산더, 로마)에 지배되면서도 계승되어왔던, 

7000년에 걸친 이집트 민족은, 그들이 싹틔운 이성과 평화의 시대가 찾아오기 천 년 전에 사라진 것이다.  






현대 이집트는 물론 고대 이집트의 계승자를 자처한다. 

그들이 부수고 열강들이 꺼내간 유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고대 이집트학 학자들의 입국 허가를 정치적 재료로 사용한다.


하지만 현대 이집트의 국민들 거의 전부가 투르크인, 아랍인, 베르베르인의 후손임은 명확한 사실이며,


그나마 신왕국 시절 고대 이집트인들과 유연관계가 있고, 

로마 속주 시절 이집트의 문화를 간신히 이어오고 있는, 소수의 콥트교도들은 박해로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출처 : 죄수번호944320164 님의 글 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community/327/read?articleId=21186012&bbsId=G005&itemId=145&pageIndex=170



  1. kipid 2017.12.09 14:54 신고

    헐... 무서운 역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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